7월, 2018의 게시물 표시

QUERTY 타자기의 결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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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RTY 타자기의 결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컴퓨터 키보드 문자판의 영문배열은 묘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본 설계상 일부러 결점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문자배열때문에 타자를 치기가 필요이상으로 어렵게 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죠,, 1774년에 이미,영국의 앤 여왕은 '모든 글자를 종이나 양피지 위에 인쇄된 것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정확하게 찍을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낸 헨리 밀이라는 영국인에게 특허권을 주었습니다. 밀의 발명품이 어떤 원리로 글자를 찍었는지,그 모양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현재 아는 사람이 없지만,같은 아이디어에 따라 노력한 사람은 세계 도처에 많이 있었습니다. 타자기 비슷한 기계에 허가된 미국 최초의 특허는 1829년에 윌리엄 오스틴 버트가 '버트의 가정글씨 인쇄기'로 받은 것이었는데, 그보다 4년 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살던 그자비에 쁘로장이 글자 찍는 기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이 기계가 보통 펜으로 쓰는 것과 같은 정도로 빠르게 말을 기록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초의 현대식 타자기를 만든 사람은 1860년대 미국 밀워키에 살던 신문 편집자 크리스토퍼 숄스 라고 하는데요, 숄스의 타자기는 얼마 전까지 전 세계에서 사용되던 수동식 타자기나 마찬가지로, 키를 누르면 종이를 때리는 금속막대의 끝에 글자가 박혀 있었습니다. 문자판은 알파벳순으로 배열되어 있었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면,문자판에 서로 가까이 배열되어 있는 글자막대들이 서로 뒤엉키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어에서 어떤 글자들이 가장 자주 쓰이는 가를 알아내서 그 글자들을 문자판 위에서 가능한 한 서로 멀리 떨어지게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타자를 치는 속도를 느리게 했고 따라서 금속막대들이 부딪칠 가능성도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QUERTY문자판이 탄생했고 지금까지...

베라 린(Vera Lynn)_ 영국가수 사전 : We'll mee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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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 린(Vera Lynn)_ 영국가수 사전 : We'll meet again 1917년생인 베라 린(Vera Lynn)은 아직도 생존해있다고 합니다. 1세기를 살아온 셈이죠,,, 베라 린(Vera Lynn)은 National treasure란 표현을 쓸 정도로 영국국민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던 국민가수입니다.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는 영국육군소속 문선대에 입대했고 많은 전쟁터에서 위문공연을 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공습으로 인해 방공호에 몸을 숨겼을 때도 영국국민들은 Vera Lynn의 노래로 위안을 삼았을 정도라고 하니.... 1939년에 발표한 "We'll meet again"은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에게 다짐하는 약속으로 "꼭 살아서 돌아와 다시 만나자" 전쟁기간 중 가장 유명했던 이 노래는 2009년 2차대전 70주년 기념음반으로 다시 발매됐고(마지막 사진) 발매되자마자 영국인기차트 1위에 오르게 됩니다. 베라 린(Vera Lynn)은 당시 92세였고 역대 최고령으로 인기차트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죠, 이 음반은 영국인의 전쟁승리에 대한 자부심과 Vera Lynn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베라 린(Vera Lynn)은 남자의 Sir에 해당하는 Dame이란 호칭을 이름앞에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스태리 큐브릭 감독의 1964년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Ending scene 마침내 핵전쟁이 발발하고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묘하게도 Vera Lynn의 이 노래가 나오는데, 영화사상 음악과 영상이 가장 조화를 잘 이룬 Ending scene 중 하나로 꼽는 명장면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We'll meet again We'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고대한족, 중국의 하카인(커지아) 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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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족, 중국의 하카인(커지아) 민족의 역사 하카( 客家, 객가, 중국어 발음으로 커지아)는 한족의 여러 민계(民系,Han Chinese subgroup) 중의 하나로 글자 그대로 '손님'이라는 뜻으로 본래 중국 한족의 한 갈래였으며 어느 한 지역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손님같은 사람들', 다르게 말하면 '이주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화북의 황하 유역, 중원이라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던 후한 시대 한족 ‘명문 귀족’의 자손이라 하는데,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하카어(객가어)는 일찍이 중원에서 쓰였을 것이라 생각되는 고대 북방 중국어의 일종으로, 그 때문에 숫자의 발음 등이 현재의 일본어 독음에 가깝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진의 영가의 난을 피해 중원에 살던 한족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하여 광둥성, 장시성, 푸젠 성의 경계 지역에 정착해, 토착 주민과 섞여 살면서 1천 년을 거쳐 현재의 민족이 되었으며, 이후 메이저우를 중심으로 대거 화남의 각 성과 전 세계 각지로 옮겨가게 됩니다. 보통 메이저우, 공저우(赣州), 정저우(汀州), 후이저우(惠州)를 하카 4주라고 하며, 주요 거주지는 광둥성, 푸젠성, 장시성, 후난성,쓰촨 성 등의 산간부 입니다. 하카 또한 한족의 한 갈래이지만 다른 한족과는 중국 내에서도 뚜렷이 구별되고 있는데,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외래이주민이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종족적인 결합력이 유난히 강한 하카는 토착민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마찰을 빚으며 갖은 어려움 끝에 중국 남부지역에 정착하게 됩니다. 하카는 어떻게 보면 중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온 민족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이 지금의 하카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박해가 있었기에 재산보다 교육에 투자하여 경찰, 군인, 정치가, 교사가 되었고, 점차 실력을 키워온 것입니다. 중국인구의 4%에 불과한 소수 민족인 ...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2.08 ~ 1587.02.08), 스코틀랜드 비운의 여왕이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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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2.08 ~ 1587.02.08), 스코틀랜드 비운의 여왕이 태어나다 제임스 4세는 죽기 전, 유언으로 왕비인 마가렛 튜더가 재혼하기 전까지 아들의 섭정이 되도록 일렀습니다. 그러나 친(親)프랑스파(派) 세력은 마가렛 튜더가 헨리 8세의 친누이였기에 아무래도 잉글랜드에 우호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되죠.  때마침, 마가렛 튜더가 앵거스의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재혼을 합니다. 이에 1515년, 친 프랑스파 세력은 자신들이 밀고 있던 올버니 공작으로 하여금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들어와 실권을 장악하게 만듭니다. 주도면밀한 올버니 공작은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으로 하여금 잉글랜드와의 국경지대를 효과적으로 방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올버니 공작이 잠시 프랑스에 가있는 동안, 마가렛 튜더가 친 잉글랜드파 귀족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올버니 정권을 전복시키고, 마침 12살이 된 아들 제임스 5세로 하여금 친정(親政)하게끔 만들어놓습니다. 그러나 말이 친정이지,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왕의 모후인 마가렛 튜더와 그의 새로운 남편이자 친 잉글랜드파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의 권세 하에 놓입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이 부부의 도움을 입어 스코틀랜드의 내정에 교묘하게 간섭합니다. 어린 제임스 5세는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자 제임스 5세는 친 프랑스파 귀족들의 협조를 얻어 앵거스 백작과 그 세력들을 추방해버립니다.  한편, 이 당시 스코틀랜드 왕가에서는 프랑스와의 오랜 동맹 관계에 기인하여, 전통적으로 왕이 프랑스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곤 했습니다. 제임스 5세 역시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으나, 프랑소와 1세가 자기 딸들의 건강 문제를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었죠. 이때 어떻게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골몰하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캐서린 아라곤과의 ...

인도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 여전한 카스트제도의 악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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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 여전한 카스트제도의 악습 인도 타밀어로는 파리아(Pariah)라고 불리우며 브라만이 쓰는 산스크리트어로는 달리트(Dalit 짓밟힌자, 부서진 자)라고 합니다. 불가촉천민을 부르는 이름인 달리트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70년대에 전투적 불가촉천민 운동조직인 달리트표범당(Dalit Panders)이 창당한 이후라고 하는데. 20세기에 들어서서 이들을 ‘하리잔’(Harijan)으로 대신 부르자는 운동이 마하트마 간디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하리’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의 다른 이름으로, 하리잔은 ‘신의 자식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리잔이라는 용어는 마하트마 간디가 달리트들의 분리선거를 인정하지 않은 데에 대한 달리트들의 불만을 잠식시키기 위해 만든 말이었으며 실제 불가촉천민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리잔이라는 이름보다는 그냥 ‘달리트(Dalit)’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더 원한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말 그대로 ‘접촉할 수 없는, 접촉해서는 안 되는’ 더러운 존재로,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 진다’는 인도인들의 생각을 내포하고 있고 10억여 명의 인도 인구 가운데에서 약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달리트는 카스트 계급질서에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집단으로, 카스트의 최하층인 수드라보다도 못한 처우를 받아 왔는데, 전통적으로 직업 또는 생활습관이 비천하고 더러운 일과 관련되어 있으면 불가촉천민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어부나 소작농, ② 소를 죽이거나 죽인 소를 치우는 일 또는 가죽무두질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 ③ 똥·오줌·땀·침 등 인체의 배설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청소부나 세탁부, ④ 쇠고기를 먹거나 집돼지·닭 등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인데, 인도의 원시종족들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이죠, 이러한 달리트(Dalit) 내부에도 약 80여개의 계층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화장실 오물수거,...

숙종(肅宗 : 1661 ~ 1720)의 대동법(大同法)과 경종(景宗 : 1688 ~ 1724)의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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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1661 ~ 1720)의 대동법(大同法)과 경종(景宗 : 1688 ~ 1724)의 책봉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 효종, 현종때와 다른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습니다. 숙종이 반정의 위기 없이 여러 차례 환국정치를 펼칠수 있었던 데에는 사대부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상대 당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숙종의 환국 정치에 편승했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상대 당을 제거하기에 바빴으며, 또 다른 환국을 우려해 임금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의 정치는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하였고(전성기 때의 광해도 하지 못한 일),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치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널리 알려진 도적인 장길산이 이때 활동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합니다. 장길산 일당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활동한 대규모 도적집단으로 조정에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상금을 내걸기까지 했지만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대단합니다) 성호 이익은 그를 홍길동, 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습니다. 숙종은 1720년(숙종 46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경종이 이었습니다. 세 살에 세자에 책봉되고, 열네 살에 생모인 장희빈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생모가 죽고 난 후의 19년을 불안과 긴장 속에 보냈습 니다. 부왕 숙종은 살가운 애정을 걷어 들였고, 막강한 정치세력인 노론은 애초부터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에 그의 실수만 바라는 눈들이 번득였습니다. 세자생활이 무려 30년, 그 중 특히 근심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19년이니, 몸은 병들어갔고 정신은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경종을 지켜 준 것은 소론, 그러니 새 임금 경종은 소론 임금이라 불러도 좋았습니다.(조선 후기는 붕당의 시대!) 그러나 조정은 노론이...

러일전쟁_ 제물포해전의 배경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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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_ 제물포해전의 배경과 결과 루든예프 함장은 일본함대의 맹렬한 공격을 돌파해 공해로 나가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우리우 제독은 아사마함에게 추격명령을 내렸고, 아사마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바략함의 자동조종장치를 박살냈다. 수동조종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바략함은 기동성이 떨어져 집중공격을 받았고, 결국 함정 곳곳에 구멍이 나 물이 새어들자 배가 좌측으로 기울어갔다. 뒤따르던 카레이츠함이 지원에 나선 것은 이때였다. 카레이츠함의 화력은 2문의 203mm 대포, 1문의 52mm포, 4문의 37mm포였다. 거의 한시간 동안 계속된 해전에서 카레이츠함은 한 발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우리우 제독의 작전이 바략함에 집중되었던 까닭이다. 공격이 이어지면서 앞 돛대에 떨어진 포탄 파편 하나가 루든예프 함장의 머리에 명중했다. 함장 옆에 서서 전투를 독려하던 나팔수와 고수(鼓手)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바략함에서는 루든예프 함장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겨우 의식을 회복한 루든예프 함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군복 차림으로 다시 사령탑에 오른다. 러시아 수병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졌지만 승부는 이미 비관적이었다. 파괴될 만큼 파괴된 바략함은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적잖은 수병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제물포로 후퇴하기로 결정한 루든예프 함장은 후퇴명령을 내린다. 나팔수의 신호음이 구슬프게 퍼졌다. 오후 12시45분, 전투개시 한 시간 만의 일이었다. 루든예프 함장은 이후 사령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후퇴 결정은 함정의 파손 부분을 급히 보수하고 부상자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16시까지 다시 출항해 해전을 계속할 각오였다”고 말하고 있다.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이 중립항인 제물포 내항으로 들어서자, 외국 함대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함대는 추격하지 않고 배를 세웠다. 일본측의 해전기록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략함이 간신...

고대유럽 지중해의 군사강국 스파르타(Σπάρτα)의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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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유럽 지중해의 군사강국 스파르타(Σπάρτα)의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하나. 스파르타(Σπάρτα)의 고대 정치체제 도리스인의 나라였던 스파르타는 앞선 세대인 크레타 섬의 도리스인들의 '혼합 정치 체제'를 차용했습니다. 경쟁 폴리스였던 아테네의 민주정과 비교해, 스파르타는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과두정(寡頭制, oligarchy)으로 사회 시스템이 움직이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과두정이라도 비교적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독재를 방지하고 사회 시스템의 높은 안정성을 유지했습니다. 스파르타의 권력은 크게 '왕과 집정관', '원로원', '민회' 로 나뉩니다. 권력의 세 파트는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하면서 체제의 유지에 힘쓰게 되었죠. 이들을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왕'입니다. 스파르타는 예로부터 아기아다이 왕가와 에우리폰티다이 왕가 출신의 두 왕이 다스렸습니다. 두 왕가 모두 헤라클레스의 자손으로 여겨졌고 동등한 권위를 가졌는데, 서로의 특정 정치적 행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왕을 두어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독재와 참주정(비합법적 권위침탈자의 정치체제)을 방지했습니다. 두 왕은 종교, 사법, 군사 분야의 일을 했으며 국가의 최고 제사장이어서, 델포이로부터 신탁을 받는 일도 맡아 했습니다. 또한, 두 왕은 원로원 의원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다음, '민회(Apella)'입니다. '민회'는 스파르타의 시민계급인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와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이었던 2계급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중 30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로 이뤄졌습니다. 이들은 법안을 인준, 거부하는 일과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 등의 외교와 관련된 일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원로원 의원을 선출...

코카콜라 VS 환타, 2차세계대전과 탄산음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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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VS 환타, 2차세계대전과 탄산음료의 탄생 지금처럼 타는듯한 무더운 날에는 시원한 청량음료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시죠. 청량음료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인 Fanta가 전쟁때문에 탄생한 음료란 거 알고 계셨나요? 2차 대전 직전의 독일은 미국의 뒤를 위어 세계 2위의 코카콜라 소비국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코카콜라 담당이었던 막스 카이트의 정, 관계에 걸친 영향력에 힘입어 코카콜라는 유럽 전역, 특히 독일에서 급속도의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노동자 들에게 알콜 음료 대신 공급되는 대체 음료로 알콜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도 기업가들에게는 코카콜라를 적극 지지할만한 요인이 되었고요. 막스 카이트는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다고 하지만,단 한명, 당시 코카콜라의 총수 로버트 우드러프에게만은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유일하게 존경했다는 로버트 우드러프에게 히틀러의 점령지에서 코카콜라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했고 결국 그는 '환타' 라는 대체품으로 다짐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1940년이 되기 전, 코카콜라의 유럽 부문은 코카콜라를 생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기로에 놓입니다. 코카콜라의 원액을 만들기 위한 핵심 물질, '머천다이즈5' 와 '7X'의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였죠.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이 두 핵심 물질을 코카콜라 유럽 부문에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코카콜라 본사에서는 우회 루트를 비롯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이 두 핵심 물질을 유럽으로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같은 연합국의 주축인 영국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일을 무리하게 추진할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코카콜라 원액 제조법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인 화학자 윌리엄 히스를 유럽에 보내서까지 (몇년 전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이미 방법을 만들어서 넘겨줬다고도 하지만) '머천다이즈 5' 를 ...

간디의 소금행진, 비폭력운동을 실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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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소금행진, 비폭력운동을 실천하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소금세'라는 세금을 매겼다. 인도사람들은 영국이 생산한 소금만 먹을 수 있고, 소금을 사 먹을 때마다 영국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법을 만든 것이다. 과자나 술처럼 안 먹어도 되는 먹을거리 이거나 귀금속 따위의 사치품이면 모를까 소금은 생명 유지를 위해서 누구나 섭취해야 하는 음식이다. 단식투쟁을 하더라도 물과 소금은 꼭 먹는다고 하는 소금! 인도에서 나지 않는다면 몰라도 영국 것만을 먹어야 한다니, 생필품인 소금에 대해서 조차 영국이 간섭하고 나서자 이런 억지에 화가 난 간디는 폭력이나 무력을 쓰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소금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생산된 목화를 헐값에 사다가, 영국 공장에서 면제품을 만들어 식민지에 비싸게 되팔아 폭리를 취하는 영국을 향해 물레를 돌려 비폭력 운동을 시행했던 간디! "아름다움으로 옷을 입지 말고 위엄으로 입읍시다". 말도 안되는 '소금세'에 대해 이번엔 간디가 나섰다. 간디가 이 소금법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소금이 있는 바닷가까지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소금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간디는 인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이랬던 간디였으니, 소금법에 협조하지 않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곳에서 시작해서 4월6일 염전이 있던 구자라트 주의 단디 해변까지, 장장 370Km를 26일간 '소금행진'을 시작 했다. 소금행진을 하던 1930년에 간디는 예순을 넘긴 나이였고, 단식 투쟁을 밥 먹듯이 하던 탓에 비쩍 마른 몸으로 26일 동안 모자도 없이, 맨발이나 다름없는 허술한 신을 신고 걸었을 모습을 상상해보자! 게다가 인도의 날씨는 4월부...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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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거대한 소금밭만 보여 절로 탄성이 나는 장관이다. 이 우유니 소금 사막은 잘츠부르크 처럼 아주 먼 옛날에 땅이 솟아올라 바닷물을 가두면서 만들어졌다. 즉 바다가 빙하기 동안 얼어 있다가 2만 년 전부터 녹기 시작해 이 지역에 거대한 호수가 생겼고, 비가 적고 건조한 탓에 오랜 세월에 걸쳐 물은 거의 증발하고 소금 결정만 남게 된 것이다. 이 소금층의 두께가 100미터가 넘는 곳도 있으니 정말로 엄청난 크기의 소금 사막이다. 또한 이곳 말고도 안데스 산맥이나 페루의 살리나스, 히말라야 산맥의 차마고도 같은 곳에도 진기한 소금 계곡이 있다. 이런 곳은 오목하게 팬 땅, 그러니까 분지에 물이 고여서 호수가 되면서 소금이 만들어진 지역이다. 흙에 섞여 있던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빗물에 점점 녹아 나오고, 햇볕에 물이 차츰 증발되면서 소금 호수가 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바닷물이 가두어져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골짜기에 빗물이 흘러드는 것만으로 생겨난 것이라니 참 신기하기만 하다. Ps.. 소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소금을 만드는 가장 흔한 방법은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물을 증발시키는 것이다. 바닷가의 경사가 없는 평평한 곳에 바닷물을 앝게 모아 두었다가 태양 볕에 물이 증발되면 바닥에 남는 소금을 거둬들이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얻은 소금을 천일제염이라고 한다. 지중해와 홍해 근처, 멕시코,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은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과 더불어 이 방식으로 천일염을 만들고 있다. 비가 내리면 지표면에 있던 여러 물질이 빗물에 씻겨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그중에서 나트륨과 염소라는 물질이 바닷물에 녹아서 결합하면 염화나트륨이 된다. 이것이 짠 맛을 내기 때문에 바닷물도 짠데 우리가 아는 천일염은 이 염화나트륨에 여러가지 미네랄이 더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