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유럽 지중해의 군사강국 스파르타(Σπάρτα)의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고대유럽 지중해의 군사강국 스파르타(Σπάρτα)의 정치체제와 사회구조








하나. 스파르타(Σπάρτα)의 고대 정치체제


도리스인의 나라였던 스파르타는 앞선 세대인 크레타 섬의 도리스인들의 '혼합 정치 체제'를 차용했습니다. 경쟁 폴리스였던 아테네의 민주정과 비교해, 스파르타는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과두정(寡頭制, oligarchy)으로 사회 시스템이 움직이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과두정이라도 비교적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독재를 방지하고 사회 시스템의 높은 안정성을 유지했습니다.

스파르타의 권력은 크게 '왕과 집정관', '원로원', '민회' 로 나뉩니다. 권력의 세 파트는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하면서 체제의 유지에 힘쓰게 되었죠. 이들을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왕'입니다. 스파르타는 예로부터 아기아다이 왕가와 에우리폰티다이 왕가 출신의 두 왕이 다스렸습니다. 두 왕가 모두 헤라클레스의 자손으로 여겨졌고 동등한 권위를 가졌는데, 서로의 특정 정치적 행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왕을 두어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독재와 참주정(비합법적 권위침탈자의 정치체제)을 방지했습니다. 두 왕은 종교, 사법, 군사 분야의 일을 했으며 국가의 최고 제사장이어서, 델포이로부터 신탁을 받는 일도 맡아 했습니다. 또한, 두 왕은 원로원 의원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다음, '민회(Apella)'입니다. '민회'는 스파르타의 시민계급인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와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이었던 2계급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중 30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로 이뤄졌습니다. 이들은 법안을 인준, 거부하는 일과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 등의 외교와 관련된 일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원로원 의원을 선출하며 매년 집정관을 뽑는 일도 합니다.

'원로원(Gerousia)'은 '민회'에서 종신직으로 뽑힌 60세 이상의 의원 30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이들은 법안을 발의하여 민회에 상정하는 일부터 각종 민사 및 형사 소송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정관(ephoroi)'이 있습니다. 일종의 감독관인 이들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된 5명으로 구성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습니다. 이들은 행정, 사법, 도덕, 교육에 관하여, 두 왕을 견제하고,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주재하는 한편, 외교와 군대파견에 관한 의결권까지 가지고 있어서 왕보다 더한 최고 권한을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스파르타는 왕정의 요소(왕과 집정관), 귀족정의 요소(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민회)가 혼합되어 상호 견제 및 보완을 함으로써, 시민의 정치참여 확대와 사회·정치적 안정성을 제고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혼합 정치 체제는 후대의 로마인들이 응용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정치 체제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둘. 스파르타(Σπάρτα)는 확실한 계급사회였다


스파르타는 계급사회였습니다.  스파르타는 시민계급인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이었던 '페리오이코이(Perioikoi)', 국가가 소유한 농노(農奴)계급인 '헤일로타이(Heilotai, Helot)'로 사회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스파르타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시민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파르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스파르타식(式) 교육 과정인 '아고게(agoge)를 마친 사람만이 시민의 자격이 주어졌고, 이들 시민계급을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라 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스파르타에 처음 이주한 도리아인들이었습니다. 이들 '스파르티아타이'는 스파르타 전체 인구의 5~10% 정도였으며, 오로지 정치와 군역에만 참여할 뿐, 이들을 먹여살리는 일은 국가농노인 '헤일로타이'들이었습니다.

단, 예외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종의 '수양 아들'인 '트로피모이(Trophimoi)'인데, 이들은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으로, 기존의 '스파르티아타이'에 양아들로 입적됨으로써, 시민계급의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다른 예외는 '헤일로타이'의 아들 가운데 '스파르티아타이'가 비용을 대고 공식적으로 입양한 자로써, '신트로포스(Syntropos)'라 불렀는데, 이들이 '아고게'에서 합격을 하면 '스파르티아타이'가 되었습니다.







한편, 도리아인이 처음 침입한 이후, 산에 살던 사람들은 비시민(非市民)이지만 자유민이었던 '페리오이코이(Perioikoi)'가 되었고, 계곡 부근에 살던 아카이아인들과 메세니아인들은 '헤일로타이(Heilotai, Helot)'가 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이중, 라코니아 해안 부근과 고산지대에 거주했던 '페리오이코이(Perioikoi)'는 '헤일로타이'와는 달리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티아타이'에게는 금지된 일인 상공업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기에 참정권 역시 주어지지 않았고, 예비군으로서 군역의 의무를 졌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빚더미에 앉거나 무리한 전투장비의 구입 등으로 파산한 '스파르티아타이'들이 '페리오이코이' 계급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런 계급 강등은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급증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화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파르티아타이'의 입장에서는, '헤일로타이'와는 달리, 유사시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공업에 종사했던 까닭에 무기 제작 및 공급, 유통 등에 있어서 '페리오이코이'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반면, '헤일로타이(Heilotai, Helot)'는 자유가 구속된 국가 소유의 노예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피정복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스파르타 건국 초기, 스파르타 지역의 도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아르카디아의 아카이아인들과 아르고스 지역의 도리아인들이 포로로 잡혀 '헤일로타이'가 되었고, 메세니아 전쟁에서 패한 메세니아인들도 '헤일로타이'가 되었습니다. 이후,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한 다른 지역의 그리스인들도 '헤일로타이'로 전락합니다.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들에서 자유시민들이 평시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만 참전했던 것과는 달리, 스파르타의 시민 '스파르티아타이'는 상비군(常備軍)이었던 까닭에 다른 육체 노동에는 종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페리오이코이' 역시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유사시에는 참전을 해야했기에, 농사와 같은 노동에는 종사할 수 없었죠.







결국, 스파르타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농사일은 전적으로 '헤일로타이'가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인의 땅을 경작하는 '미숙련' 농노(農奴)였던 것입니다. (여성 헤일로타이는 유모로 일하기도 했답니다.)

'헤일로타이'는 모두 국가 소유였고, '스파르티아타이'에게 고루 분배되었습니다. 다만, 이들에게도 가정을 꾸릴 권리는 주어졌으며, 국가로부터 생산물을 지급받아 그것으로 연명했습니다.

'헤일로타이'가 피정복민들로 이루어졌다보니,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BC 685년, 메세니아의 왕족이었던 아리스토메네스의 주도하에 벌어진 '헤일로타이의 대반란'(2차 메세니아 전쟁) 이후, '헤일로타이'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적대심은 고조됩니다. 결국,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의 법률 제정에 의해 '헤일로타이'에 대한 강력하고도 가혹한 대우가 시작됩니다.

특히, 해마다 새로운 '집정관'이 취임하면 의례적으로 '헤일로타이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스파르타인들로 하여금 '헤일로타이'들을 마음껏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런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을 가리켜 '크립테스(Kryptes)'라 불렀는데, '크립테스'는 스파르타 지도층에 의해 조직된 일종의 '비밀경찰조직'인 '크립테이아(Krypteia)'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원래 '헤일로타이'는 반란의 위험이 컸기 때문에, 참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는 전설적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함께 수백 명의 '헤일로타이'도 함께 싸웠다고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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